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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솔부 9월 호] HELLO DOCTOR? 上

 

[최한솔 X 부승관]

HELLO DOCTOR? 上

 

 

 

 

월의 중순과 막바지의 경계에 걸쳐있는 요즈음. 벌써 지나간 입춘이 무색하게 더운 날씨는 아무래도 죽어보란 심산이지 싶다.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 오늘도 있는 힘껏 열을 내뿜는 태양이 오늘따라 얄궂다. 조금이나마 더위를 무찔러보고자 입에 물고 온 아이스크림은 맥없이 녹아 툭툭, 아스팔트 바닥에 원들을 만든다. 더 녹아 손에 묻기 전에 입 안에 쑥, 밀어 넣은 승관은 길거리에 보이는 쓰레기통에 막대기를 던지곤 손을 탈탈 털었다.


아이스크림을 먹어도 덥네. 무심결에 열었던 창문으로 훅 들어오던 열기에 놀라 찾아 입은 민소매가 무색해졌다. 땀에 젖은 앞머리는 집에서 곱게 빗고 나온 형태를 잃은 지 오래고. 더위에 지쳐 머리에 신경 쓸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은 탓에 결국 아무렇게나 넘겨버리고 만다. 짜증 어린 손길에 머리칼이 맥없이 넘어가며 감춰둔 이마를 드러냈다. 열기를 한껏 머금은 아스팔트 위를 내딛는 승관의 걸음이 점점 느려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날씨에 나오는 건 미친 짓이 틀림없다. 집에서 편하게 쉬려고 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아침에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아 이때다 싶어 학교를 빠졌더랬다. 방학 중에 참여하는 자습일 뿐이고, 비록 고등학생의 신분인 이상 필참 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방학인 만큼 하루는 봐 주겠구나 했더니 이게 웬걸. 융통성이라곤 티끌만큼도 없는 담임이 처방전이라도 끊어오라는 게 아닌가. 3의 신분인 주제에 자율학습을 빠지려 드는 대가로 서류라도 제출하라는 게 담임의 주장이었다. 그에 학교는 가기 싫은 마음 반, 더럽고 치사해서 시키는 대로 한다는 심산 반으로 당당히 오케이를 외쳤더랬다.

 

 

허나 근처에 병원이라곤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병원뿐임을 알아차린 것은 전화통화를 끝낸 후 밖을 나섰을 때였다. 버스를 타기도 애매한 거리인 탓에 결국 온갖 짜증은 다 내며 걷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할 만한 학교나 갈 걸 그랬다는 뒤늦은 후회도 한 번쯤 해준다. 학교는 에어컨이라도 틀어주지 않던가. 비록 에너지 절약을 이유로 25도로 맞춰두는 게 좀 흠이지만.

 

이놈 저놈, 온갖 놈이란 놈은 다 찾으며 들어온 병원은 시원한 공기와 함께 묘한 소독약 냄새가 났다. 잔병치레가 드문 승관은 병원에 오는 게 오랜만인지라 병원 냄새를 맡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첫 방문인 관계로 간단한 서류를 작성한 승관은 대기를 위해 자리에 앉아 병원 내부를 훑었다.

 

오랜만에 방문하는 병원이지만 늘 그랬듯 긴장감과 함께 묘한 울렁임이 동반됐다. 약품 냄새로 속이 뒤집히는 것도 있지만, 즐겨보던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치명적인 문제라도 발견될까 싶은 우스운 마음 탓도 있다. 여느 병원과 다를 것 없이 깔끔한 덕분에 내부 구경에 금세 흥미를 잃은 승관은 책꽂이로 손을 뻗다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도로 거두었다. 잡지나 읽어볼까 했더니.

 

 


"부승관 님, 진료실로 들어 가실게요."
", .“

 

 

 

간호사의 안내에 승관은 쭈뼛대며 진료실 문을 열었다. 그러자 좀 더 진하게 풍기는 소독약 냄새와 함께 의사의 얼굴이 시야에 잡혔다. 자신을 진료해줄 의사를 보자마자 첫 번째로 든 생각은, 뭐야 왜 이렇게 젊어.

그리고 두 번째는,

 

 


첫 방문이시네요? 부승관 씨.”
, .”

 

 


뭐 이렇게 잘생겼어. 얼핏 뵈도 혼혈로 추정되는 젊은 의사의 조막만하지만 남자다운 얼굴에선 이목구비가 각자의 주장을 강력히 피력하고 있다. 살면서 본 사람 중에 제일 잘생긴 것 같아. 승관은 그리 생각하며 무안하게도 넋을 놓고 말았다. 무슨 컴퓨터 그래픽인가.

 

 


제가 그렇게 잘생겼어요?”
?”
농담이에요.”

 

 


전혀 농담이 아닌 것 같은데. 승관은 의사의 말에 어이가 없어 날아가려던 정신을 꽉 붙잡았다. 하긴, 나 같아도 거울에 저런 얼굴만 보이면 잘생긴 낙으로 살겠네. 잘생겼다고 감탄하던 게 무색하게도 금세 궁시렁 대고 있다. 시시각각 바뀌는 승관의 반응이 웃긴 듯 의사는 피식 웃으며 얇은 실테의 안경을 벗어 책상 언저리에 내려놓았다. 의사의 움직임을 따라가던 승관의 시선은 안경 부근에 놓인 명패에 다다랐다.


최한솔. 곱게 각인된 이름 석 자를 속으로 곱씹는다. 서양적인 얼굴과 대비되는 순박한 이름이다. , 저렇게 생겼으면 이름이 로버트라도 되어야 하지 않나. 잡생각에 빠져있는 승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솔은 손뼉을 두어 번 쳤다. 이만 현실로 돌아오시고.

 

 


, 죄송해요.”
괜찮아요. 그나저나최근에 이사 왔어요?”
아뇨. 여기 쭉 살았어요.”
근데 처음 온 거예요? 이 근처에 병원은 여기밖에 없는데.”
평소엔 부모님이 오래 다니신 병원으로 다녀서요. 거기 의사 분이 부모님 친구시거든요.”

 

 


어른이 물어보는 질문이여서인지, 아니면 이 젊은 의사가 주는 묘한 위압감이 있어서인지 몰라도 구구절절, 묻지도 않은 말까지 내뱉는다. 얼떨결에 부모님 친구 분까지 언급했음을 깨달은 승관은 너무 재잘댔나 싶은 마음에 뒷목을 긁으며 한솔의 반응을 살폈다. 별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곤 서류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에 맥이 풀리는 것 같기도 했다. 허나 그것도 잠시, 아까 작성한 서류가 그의 손에 들려있음을 확인한 승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원래 선생님이 그런 것도 보세요?”
그냥 뭐, 이런 것도 봐둬야 환자랑 얘기하기 편하잖아요. 개인 병원이라 한가하기도 하고.”
그렇구나.”
어디가 아파서 왔어요? 원래 이것부터 물어봤어야 했는데.”

 

 

 

진료실에 들어온 지 5분이 지나서야 본론으로 들어섰다. 승관은 감기 기운이 살짝 있다고 대답하곤 별 건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사실 처방전만 받아갈 생각도 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혼날 것 같아서. 어쨌거나 감기 기운이 있는 건 사실이니 이참에 약이라도 받아가서 미연에 증세를 약화시키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구체적인 증상은요?”

, 목이 조금 아프고 콧물이 나요. 근데 진짜 심하진 않은데.”

일단 봅시다.”

 

 

 

승관은 진료를 위해 은색의 스테인리스 통에서 나무 막대기를 꺼내는 한솔을 보며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그렇게 나이가 많은 것 같진 않은데, 개인병원까지 차릴 정도면 능력 있는 사람인가. 나이는 몇 살 쯤 이려나, 잘생기긴 진짜 잘생겼네하는 영양가라곤 없는 생각들.

 

 


입 크게 벌려 봐요.”
아아-”

 

 

 

한솔의 말에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던 생각이 일순간 사그라들었다. 승관이 입을 동그랗게 벌리자 나무 막대가 불쑥, 입 안을 침범한다. 막대가 혓바닥을 묵직이 누르는 느낌은 그리 좋지 않다. 과장을 좀만 보탠다면 숨을 못 쉴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설상가상, 자신의 목젖을 살피기 위해 가까이 다가오는 얼굴이 부담스러워 승관은 눈을 바닥으로 내리 깔았다.

 

 

 

부승관 씨.”

?”

 

 

 

입 안에서 나무 막대가 빠져나감과 동시에 불리는 자신의 이름. 막대에 가느다랗게 매달린 자신의 타액이 부끄러웠다. 승관은 거두었던 시선을 도로 올려 한솔에게 향했다. 그러자 다시금 맞물리는 눈동자는 묘하게 배 언저리를 간질거리게 했다. 아무래도 제게 눈을 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잘생긴 얼굴은 웃음기를 잔뜩 머금고 있다. 뭐가 그렇게 웃겨요? 승관은 제 앞의 의사에게 너털스레 물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목이 조금 부었네요?”

, 그래요?”

별로 심하진 않고. 청진기 좀 대볼게요.”

.”

 

 

 

겨울처럼 두터운 옷을 입었을 땐 으레 옷을 들어 올리는 게 당연한 일이다. 허나 지금은 얇은 민소매 하나 입은 게 다이니 굳이 안 그래도 될 것 같고. 짧은 생각을 마친 후 멀뚱히 손을 무릎 위에 모아 진료를 기다리는 승관을 본 한솔은 짓궂은 마음이 불쑥 들었다. 진찰을 빌미 삼아 장난을 쳐도 제 앞의 아이는 별 수 없겠지하는 생각이 들어서.

 

 

 

옷 올려요.”

꼭 올려야 해요?”

 

 

 

이거 되게 얇아서 괜찮을 텐데. 옷자락 끝을 보여주며 울상을 짓는 승관이 너무 귀여운 나머지 큰 소리로 웃을 뻔했다. 장난은 둘째 치고 웃겨 죽겠는 표정을 숨기는 것부터가 고역이다. 나는 진중한 어른이다, 나는 진지해야 한다. 마치 주문처럼 뇌까린 말들은 사실 전혀 들어맞지 않았다. 처음 본 아이에게도 장난이 치고 싶어 죽겠는데 진중은 무슨. 한솔은 웃음을 너무 참은 나머지 파르르 떨리는 입 꼬리를 둥글게 매만졌다. 초면에 이렇게 장난 치고 싶어진 사람은 처음이라 하면 믿어줄까?

 

 

 

얼른 올려요. 빨리 끝내줄게.”

…….”

 

 

 

민망한데혼잣말치곤 좀 컸던 승관의 말끝이 흐리다. 옷자락을 매만지는 손가락 끝까지 싫다는 기색이 드러나는데도 순순히 옷을 들어 올리는 아이가 귀여웠다. 한솔은 청진기를 들어 올리면서도 아이의 배로 향하는 시선을 숨기지 않았다. 군살은 없는 주제에 말랑해 보인다 싶더니, 진찰을 위해 손을 올리자 말캉하게 손가락 끝을 자극하는 어린 살이다.

 

 

 

뱃살은 별로 없네요.”

살이 워낙 잘 쪄서 관리해요.”
관리?”

헬스클럽이요. 공부해야 돼서 매일은 못가고, 격일로.”

 

 

 

그나마 입고 있던 얇은 민소매도 반쯤 들어 올린 주제에 잘도 재잘거린다. 눈앞의 아이에게 자신은 아무런 위험도 아니란 소리다. 잘 쳐줘야 좀 잘생긴 의사쯤이려나. 그 이상으론 이어지지 않았을 거란 생각에 어쩐지 열이 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민망함은 있어도 불안감이라곤 없는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진료를 가장했어도 맨살까지 만지고 있는 사람인데, 위기의식은 좀 가져줘야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이 더 즐겁지 않겠나.

 

 

한솔은 짖궃은 미소와 함께 청진기가 들려있지 않은 손을 올려 승관의 옆구리로 뻗었다. 배와 마찬가지로 군살 없는 옆구리가 얼추 한 손에 쥐어진다. 자신의 손이 사내의 손임을 감안하더라도 제 눈앞의 아이 또한 사내다.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이렇게나 관리를 열심히 했을까. 머릿속으로 익명의 여자 아이들을 둘 셋쯤 그려보다 만다. 어차피 지금은 제 손에 있는데 무슨 상관인가 싶어서.

 

 

 

진짜 살이 금방 쪄요? 옆구리 살도 없네.”

아니,

운동은 좀 더 열심히 해야겠네요. 너무 말랑거려.”

 

 

 

물론 나야 말랑거리는 쪽이 좀 더 좋긴 한데. 뒷말은 가뿐히 삼켜낸 한솔의 손은 꽤나 대담하게 승관의 옆구리를 어루만졌다. 뭐하시는 거냐며 어물거리는 아이의 말쯤은 가뿐히 무시해준다. 반응을 좀 더 살펴볼까 싶어 등허리 쪽을 손가락으로 훑으니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츠린다. 간지럼도 잘 타는구나. 그것이 못내 만족스러운 듯 한솔은 스멀 올라오는 웃음을 삼켰다.

 

 

 

오늘 진료는 여기까지.”

 

 

 

맘 같아선 뒤의 환자들을 돌려보내고 싶을 정도지만, 유감스럽게도 자신은 모든 환자를 돌봐야 하는 의사다. 제 말에 얼떨떨한 듯 옷을 내리는 모습이 귀엽다. 늘 똑같았던 루즈한 진료가 짧게 느껴진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한솔은 약 처방을 위해 키보드를 가볍게 두드리며 시선 한 편으로 옷매무새를 다듬는 아이를 주시했다. 오늘 처음 본 아이에게 마음이 동해 진료까지 불성실하게 임했음에 심심한 자책을 날려주는 것도 잊지 않고.

 

 

 

3일치 처방 해줄 테니까 잘 챙겨 먹어요.”

.”

 

 

 

매일 진료를 가장해 놀려주고 싶은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그럴 듯한 핑계가 떠오르지 않는다. 약을 하루치 씩 끊어서 처방해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주 아프라고 할 수도 없고. 의사와 환자의 관계로 자주 볼 수 있는 방법은 한정적이다. 아픈 사람만을 만나는 일인 자신의 직업이 처음으로 아쉽게 느껴졌다.

 

 

 

약 잘 챙겨먹고, 잠도 잘 잤는데도 아프면 또 오세요.”

.”

 

 

 

결국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 초면인 아이에게 잔뜩 지분댄 주제에 하고픈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부끄럼 많은 아저씨라고 포장할 순 없으려나. 처방해줄 약의 이름까지 전부 입력한 한솔은 턱을 괴고 승관을 바라보았다. 다음에 만나면 저 통통한 볼을 쿡 찔러보고 싶은데.

 

 

 

잘 가요, 부승관 씨.”

. 또 뵐게요.”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온 승관이 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의 일련의 행동들을 빠짐없이 주시한다. 자신의 인사말 뒤를 이어온 또 뵙겠다는 말이 유독 반갑다. 비록 별 생각 없이 뱉은 말일 테지만 아마 자신은 오늘 내내 그 말을 곱씹을 것이다. 오늘 처음 본 아이가 삽시간에 하루를 앗아갔다. 그것이 신기하면서도 좋아서 어이가 없었다. 미친 걸까 싶을 정도로. 닫힌 문만 하릴없이 바라보다가, 아이의 손길이 닿았을 문 손잡이를 또 한참.

 

 

 

또 봅시다. 최대한 빨리.”

 

 

 

갈 곳 잃은 혼잣말이 고요한 진료실에 울렸다. 하루를 뺏긴 그에게는 몇 배의 기다림이 남아있었다.

 

 

 

 

 

 

* * *

 

 

 

 

 

 

애처롭게 4의 끝에 머물러있던 시침이 기어코 5로 넘어간다. 세상의 땅 덩어리라고는 두 폭의 병원 입구만 남은 것처럼 한 자리에서 종종거리던 승관은 큰일이라도 난 것 마냥 탄식을 뱉었다. 대부분의 병원이 그러하듯 한솔의 개인병원 또한 6시가 되면 문을 닫는다.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다간 이도저도 안 된다는 소리였다. 교복 셔츠의 단추를 두어 개 풀어도 가시지 않는 답답함은 기어코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우겨오고 있다.

 

정말 들어갈 거야?

 

불안 섞인 자문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몸뚱이는 기어코 발을 내딛었다.

 

 

 

 

 

저번 진료는 단순한 진료가 아니었다고 생각해도 좋을까. 승관은 아직도 판단을 제대로 세우지 못했다. 난생 처음 겪어본 일이었거니와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기에 3일은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다. 아무리 젊은 의사이기로서니 환자의 옆구리께나 허리를 어루만지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게다가 여의사도 아니고 남의사이지 않은가. 그것도 과도하게 잘생긴.

 

단순히 자신을 귀여워한 것이라고 여기기엔 그 손길이 야했다. 한솔에 비해 자신이 어린 것은 맞았지만 손길에 내포된 뜻을 모를 나이는 아니지 않은가. 열아홉, 미성년의 끝자락을 웃도는 나이, 열아홉. 미성숙한 만큼 주위의 자극에 쉽게 민감해지는 나이이기도 했다.

 

피할수록 진득하게 좇아오던 낙엽 빛깔의 눈동자는 이유 모를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꼭 잡아먹힐 것만 같은 느낌이어서 그랬을까. 그는 호랑이에 자신은 토끼, 진료실은 도망치다 구석에 내몰린 동굴. 정말로 그랬다. 3일간의 텀 동안 그에게 자신은 한입거리도 아닐 거라는 두려움이 별안간 들곤 했다.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고 판단할까, 아니면 그냥 생각을 관둬버릴까. 생각을 관둔다고 해서 정말로 끝맺음이 되는 건가. 꼬리에 꼬리를 물던 고민은 결국 끝을 맺지 못해서

 

 

 

어떻게 오셨어요?”

아 저감기요.”

 

 

 

결국은 이렇게 병원에 들어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감기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본 것 같다는 뉘앙스로 미간을 찡그린 채 자신을 관찰하는 간호사의 시선은 모른체 해준다. 이름과 생년월일까지 말한 후 간호사의 다음 말을 기다리던 승관은 애꿎은 손톱만 괴롭혔다.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 탓에 생긴 가시래기가 오늘따라 거슬렸다. 짧은 손톱으로 꿋꿋이 가시래기들을 뜯어내다가, 기어코 피를 보고 나서야 움직이던 손가락을 멈추었다. 손가락을 감싸오는 따끔한 감각이 이제는 좀 정신을 다잡으라고 일러주는 것 같기도 했다.

 

 

 

“3일 전에 오셨네요?”

, . 감기가 다 안 나아서…….”

 

 

 

진료 기록을 보던 간호사는 승관이 3일 전에 왔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자신이 맞았다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해왔다. 내가 사람 보는 직업인데, 라는 듯한 눈빛. 그에 제발이 저린 승관은 감기가 다 낫지 않았으며, 이제는 열까지 나는 것 같으니 다시 진료를 받아야한다는 둥 구구절절, 누가 봐도 변명인 말들을 늘어놓았다. 그러고는 간호사의 대답을 기다리며 엄지손톱 한켠에 몽글하게 솟아오른 핏방울을 꾹 누르곤 아무렇게나 문질렀다.

 

 

 

지금 마침 대기하는 분도 없으니까 바로 들어 가실게요.”

, 바로요?”

.”

 

 

 

오늘 그를 보러 온 것은 맞지만, 그렇다 해서 이렇게 빨리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승관은 진료실의 손잡이를 붙들고 또 한참을 고민했다. 처방 받았던 약도 다 비우지 않았으면서 이렇게 병원에 발을 들인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다. 옅게나마 있던 감기 기운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자취를 감춘 지 오래이지 않은가.

 

그래도일단 얼굴이라도 보고난 후에 마저 고민해야하지 않을까. 승관은 앞 다투어 달려드는 고민들을 뒤로한 채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일전에도 맡았던 약품 냄새가 좀 더 진하게 코끝에 달라붙는다. 승관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마냥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시야에 한가득 차는 이는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웃고 있다. 진료실에 들어가 그의 앞에 앉노라면 그는 분명 눈치 챌 것이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자신이 아픈 구석도 없으면서 진료실에 발을 들였단 것을.

 

 

 

 

* * *

 

 

 

 

결국은 3일 만에 같은 상황의 반복이다. 등받이가 없는 동그란 원형 의자는 언제라도 뒤로 고꾸라질 것만 같다는 불안감을 안겨준다. 승관은 가지런히 모은 손을 조물거리며 한솔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3일 전과는 몇 가지 다른 점이 눈에 띄어 승관은 티가 나지 않게 그를 훑어 내렸다. 저번엔 진료 중간에 벗었던 안경을 오늘은 처음부터 끼고 있지 않았다는 것과, 일전엔 차분하게 내렸던 머리를 가볍게 올렸다는 것. 왁스 탓에 빳빳이 올라간 한솔의 앞머리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문득 그가 정말 어른이라는 느낌을 받아 묘한 괴리감까지 느끼게 되는 것이다.

 

 

 

교복이네요?”

, . 학교 끝나자마자 온 거라

잘 어울린다.”

 

 

 

한참을 다물려있던 입에서 나온 말은 그것이었다. 교복이네, 잘 어울린다. 의미 없이 흘려보냈을 그 말을 주워 담아 곱씹는다. 교복이 잘 어울린다는 말은 교복점의 주인도, 부모님도, 누나들도 수차례 해주었던 말이다. 그럼에도 처음 듣는 말인 것 마냥 볼이 붉어져 어쩔 줄을 모르고 만다. 어제 개학을 했고, 교복은 너무 어려 보일까봐 옷을 갈아입고 올지 고민했고, 그러다가 자칫 병원 문이 닫을까봐 교복 차림으로 달려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원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고. 하고픈 말들이 입 안에서 맴돌았으나 내뱉을 자신은 없었다.

 

 

 

감사합니다.”

교복이 특이해. 보통 와이셔츠엔 무늬가 없지 않나?”

, 맘에 들진 않는데 그래도 잘 입고 다녀요.”

착하네요. 단추 꼭꼭 채워 입어서 더 예뻐 보이나봐.”

 

 

예상치 못한 순간에 당한 한 방. 그 공격에 평정을 잃은 심장 박동은 점차 속도를 올렸다. 승관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놀란 눈으로 한솔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냐는 듯한 눈빛. 뻔뻔하고도 진득한 눈빛에 다시금 전의 진료는 진료가 아니었음을 상기한다. 그것을 알면서도 다시금 진료실에 발을 들인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다. 승관은 말라가는 입 안을 느꼈다.

 

 

 

진료 시작할까요?”

.”

증상은 어때요? 아직도 아픈가?”

 

 

 

아니요, 말끔히 나았는데요. 대체 왜 여기 온 건지 저도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승관은 이유 모를 초조함을 품에 안은 채 한솔의 진료를 기다렸다. 다 나았는데 병원엔 왜 온 거냐며 혼을 내와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열 한 번 재보고, 청진기로 두어 번 갖다대보고 나면 들통 날 게 뻔했다. 아픈 이들만 있어야 할 곳을 침범한 이방인이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거의 다 낫긴 했는데그래도, 진료 받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랬구나.”

 

 

 

얼러주는 듯한 대답과 함께 입가로 한솔의 손이 불쑥 다가왔다. 열어달라는 듯이 톡톡 입술을 건드려오는 손가락. 남자다운 선과 대조되게 매끈하다고 생각했던 손이다. 승관은 무언가에 홀린 이처럼 멍한 시선으로 입을 벌렸다. 그러자 한솔의 손가락이 입술을 걸쳐옴과 동시에 막대기가 입 안을 침범했다. 3일 전과 마찬가지로 나무 막대기가 혓바닥을 사근히 누른다. 그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한솔의 손가락이 자신의 입술에 닿아있다는 것과, 자신의 입 안과 입술을 번갈아가며 보고 있는 그가 신경 쓰여 나무 막대의 이질감은 뒷전으로 미뤄뒀단 것이었다. 보통 진료에서 이 과정은 목젖이 부었는지를 확인해보기 위함이 아니던가.

 

 

 

목은 다 가라앉았네요.”

약을 잘 챙겨먹어서 그런가 봐요.”

기특하네.”

 

 

 

생각난 대로 둘러댄 변명에 칭찬까지 받아버렸다. 승관은 어색한 웃음과 함께 시선을 회피했다. 하루치를 겨우 비운 채 책상 위를 나뒹굴던 약 봉지를 잊은 것은 아니다. 별로 아프지도 않으면서 병원은 왜 갔냐는 큰누나의 핀잔은 아직까지도 귓가에 맴도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러댄 이유는, 그냥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이제 청진기 대볼게요.”

.”

 

 

 

3일 전 한솔의 눈빛은 분명 다시 보기를 바란다는 속을 내포하고 있었고, 그것을 캐치할 정도의 눈치는 제게 있었다. 그러나 내색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제 앞의 의사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확신하지 못해서인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어서인지. 승관은 교복 와이셔츠의 밑단을 쥔 채 망설였다.

 

 

 

내가 올려줘요?”

뭘요?”

.”

 

 

 

아니요, 제가 올릴 건데. 승관은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며 와이셔츠를 슬몃 들어올렸다. 그 모습에 옅은 웃음을 흘리던 한솔은 청진기를 아이의 몸에 대려다 말고 멈칫했다. 제 모습에 아이의 얼굴에 긴장이 들어차는 게 보여서. 어떻게 웃지 않고 배길까. 또 뭘 하려고 그러느냐는 눈빛이 너무나도 정확한 탓에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꾹꾹 밀어 넣는다. 제 표정에 아이는 기어이 입을 열어 제멋대로 품어버린 의문을 해결하고자 한다.

 

 

 

왜 그러세요?”

아니들어올리기엔 와이셔츠가 불편하지 않아요?”

아뇨, 넉넉해서 괜찮은데

역시 단추를 푸르는 게 낫겠죠?”

 

 

 

애초에 아이의 의사를 묻기 위해 내뱉은 질문은 아니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얌전히 박동만 듣고 끝낼 것 같진 않아서자유로운 공간을 확보하기 위함이라고 해야 하나. 딱 두 개만 풀게요. 한솔은 그 말을 끝으로 승관의 와이셔츠로 손을 뻗었다. 맘 같아선 다 풀고 싶다고 말을 해줄까 하다가 그만 두고 만다. 그 말은 다음에 행동으로 옮겼을 때 해도 늦지 않으니까. 어설프게 헤쳐진 와이셔츠 너머로 아이의 배가 보인다. 이전에 만져본 말캉한 촉감이 떠올라 한솔은 청진기를 귀에 꽂으며 입맛을 다셨다.

 

 

 

심장 박동이 좀 빠르네요.”

그래요?”

체온도 좀 높은가?”

 

 

 

손끝에 닿은 아이의 살갗에선 퍽 뜨거운 기운이 피어오른다. 그와 맞물려 불규칙하게 뛰는 승관의 심장 박동은 이제는 좀 눈치 채라고 알려주는 것도 같았다. 숙인 고개를 들어 아이의 흔들리는 시선을 보고 나서야 한솔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은 지 오래인 감기는 묵인한 채 부러 병원에 발을 들인 아이의 심리를.

 

 

 

내가 체온 재는 가장 좋은 방법을 아는데, 알려줄까요?”

뭔데요?”

 

 

 

한솔은 아이의 몸을 끌어 자신의 앞으로 했다. 맥없이 끌려온 승관의 얼굴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린 티가 배어나오는 모습에 일말의 죄책감이 맴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나쁜 짓을 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정말이지 체온을 재주려는 것뿐이니까. 한솔은 아이에게 몸을 밀착하고선 붉은 빛을 띠는 그의 귀에 다가가 사근히 속삭였다.

 

 

 

입 맞춰보는 거.”

 

 

 

한솔은 말을 끝냄과 동시에 아이의 팔을 잡아당겨 입술을 맞댔다. 말캉하게 닿은 살덩이를 비집고 들어가 혀를 밀어 넣자 뜨거운 내부가 자신을 반겨준다. 속눈썹까지 파르르 떨리던 승관의 눈두덩이가 눈동자를 감싸고 나서야 눈을 내리 감는다. 이제부터가 진짜 진료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