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EXT

[솔부] 우연이 모여서

[최한솔 X 부승관]

우연이 모여서





"먼저 들어가 볼게요."

"최 대리님, 오늘도 운동 가세요?"

", . 매일 가는 거라서."

"어머. 성실하셔라."

 

 


 

내 성실이 너랑 뭔 관련이 있냐. 오늘도 어김없이 살랑이는 여사원의 꼬리 짓을 가볍게 무시한 한솔은 고개를 대충 까닥이곤 회사를 벗어났다. 별로 귀엽지 않은 자신의 성격을 드러내봤자 사회생활에 좋을 게 없음을 알기에 오늘도 튀어 나오려던 뾰족한 말을 삼킨다.

 

 

운 좋게 취업을 준비하기 시작했던 해에 대기업에 합격했다. 더 이상 부모님 용돈을 안 받아도 된다는 기쁨과, 남들은 몇 년이나 준비하는 취업을 반년 만에 해낸 것이 기뻤다. 퇴근 후의 여가시간과 주말의 빈 시간을 허투루 쓰는 것이 아까워 다니기 시작한 헬스는, 몇 번 옮기긴 했어도 꾸준히 다니는 중이다.

 

 

햇수로 5년 쯤 됐나 싶다. 처음엔 힘들었지만 제게 운동은 보기 좋은 몸은 물론이고, 이따금 시에서 주최하는 마라톤에도 나갈 만큼의 체력을 안겨주었다. 덕분에 점차 맛이 들려 운동 자체를 즐기게 됐다. 회사 사옥에서 벗어나 도보로 십분 쯤 걸으면 자신이 다니는 헬스클럽이 나온다. 이번에 옮기게 된 헬스장은 신설인 덕에 내부도 깨끗한데다 기구들도 다 신식이라 맘에 쏙 드는 참이다. 집에서 좀 먼 게 흠이긴 하지만, 전에 다니던 헬스클럽을 그만 둔 이유가 하루가 멀다 하고 고장인 기구들 탓이었으니 그 정돈 눈감아줄 수 있다.

 


 

"일단 몸 풀 겸 러닝부터 할까."

 

 


락커룸에서 옷을 갈아입은 한솔은 노래를 들을 핸드폰에 이어폰을 아무렇게나 둘둘 감은 뒤 물통을 챙겨 사물함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선 벽에 붙은 대형 거울에서 옷매무새를 정리하다가 바지를 허리춤에서 조금 내려 길이를 조절했다. 며칠 전 민규와 아울렛에 가서 별 생각 없이 산 운동복 바지가 짧다. 역시 입어보고 샀어야 했는데, 쇼핑이 길어진 탓에 둘 다 피로가 누적되어 판단이 흐려졌었다.

 

 

한솔은 헬스장에서 나눠주는 기본 운동복이 촌스러운 탓에 번거롭더라도 늘 운동복을 챙겨 다녔다. 고작 검은 나시에 반바지뿐이긴 하지만, 혼자 사는 자취남인 주제에 매일 새로 빤 운동복을 들고 다닌다는 점에서 자신의 성실함이 보이지 않을까 한다. 옮긴 지 얼마 안 된 터라 알아줄 사람은 없지만, . 전에 다니던 헬스장도 햇수로 3년이나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인맥을 쌓지는 않았으니 이번에도 비슷할 것 같지만. 사실 낯선 사람과 말 나누는 데에 거부감이 있달까. 정말이지 사회 생활하기에 최악의 성격이 아닌가. 스스로가 한심해진 한솔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곤 러닝머신에 올랐다.

 

 

 

"일단 가볍게 시작했다가……."

 

 

 

 

자신의 취향은 무언갈 할 때 오롯이 그것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운동할 때 정신 사나워지는 게 싫어 러닝머신에 달린 텔레비전도 보지 않는다. 같은 연유로 시끄러운 음악도 듣지 않는다. 적당한 비트의 노래를 들으며 벅차다 싶을 만큼의 속도로 달릴 때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운동할 때 즐겨듣는 곡을 반복 재생으로 설정해둔 한솔은 적당히 빠른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우선은 빨리 걸었다가, 지루해진다 싶을 즈음에 뛰기 시작해야지하고 머릿속으로 순서를 정한다.

 

 


"저기요, 아저씨."

 

 

 

빠르게 걷는 게 지루해진 탓에 속도를 올리려던 참이었다. 평소 청력에 문제가 될까봐 이어폰 소리를 작게 해둔 터라 어떤 소년의 목소리가 잘 들렸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눈을 동그랗게 뜬 아이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눈도 동글동글, 얼굴도 동글동글. 온통 동그란 아이가 제 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에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며 누굴 부르는 건지 확인했다. 저 말고는 남자가 없음을 확인한 한솔은 미간을 한껏 찌푸리며 다시금 소년을 마주했다. 설마 지금 나보고 아저씨라고 한 건가.

 

 

 

지금 나 부른 거야?”

. 아저씨.”

 

 

 

아무리 자신이 앞자리 수가 3, 뒷자리 수는 1인 삼십대로 접어들었다고 해도 아저씨 소리를 들을 나이는 아니다. 게다가 잘 쳐줘야 고등학생 같은데, 저랑 나이차이가 나봤자 얼마나 난다고. 이렇게 젊은 아저씨 봤냐고 한 마디 해줄 심산으로 한쪽 귀의 이어폰을 빼내며 입을 뗐다.

 

 


몇 살인데 나보고 아저씨라고 하는 거야?”

열아홉이요.”

 

 


서른하나에서 열아홉을 빼면 몇 살이던가. 앞의 아이에게 티 나지 않게 손가락을 접어가며 그 수를 헤아려본다. 와 세상에. 띠 동갑이네. 한솔은 아이에게 훈계 해주려 열었던 입을 합, 다물어 말을 삼켰다.

 

 

 

아저씬 몇 살인데요?”

너보다 별로 안 많아. 부를 거면 형이라고 불러.”

 

 


사실 평소의 제 성격이라면 그냥 가라고 손이나 휘휘 내 저어야 맞는 건데. 어째서 밀어내야겠단 생각이 들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제 말에 그래요, !’ 해오는 녀석이 참 속없다 싶어 웃음이 났다. 속도를 올려야 하는데, 외려 속도를 낮추며 녀석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옆의 아이는 하고픈 말이 많은지 러닝머신의 작동 버튼도 누르지 않은 채 초롱초롱, 눈만 빛내고 있다. 하지도 않을 거면서 올라와 있으면 분명 누가 뭐라 할 텐데.

 

 


느리게라도 켜놔.”

?”

러닝머신. 하지도 않으면서 서있으면 혼나.”

 

 

 

, 맞다. 그제야 생각 난 듯 버튼을 꾹꾹 누르는 손가락이 귀엽다. 아이가 정신이 팔린 김에 슥 훑어보니 어째 학교 체육복인 것 같아 한솔의 고개가 갸우뚱하고 옆으로 넘어갔다. 헬스장을 다니다 보면 학생들을 적잖게 보곤 했지만 학교 체육복을 입은 사람은 처음 본다. 진짜 특이하네, .

 

 


학교 체육복이야?”

, . 첫날이라 운동복을 안 갖고 와서.”

헬스장에도 운동복 구비 돼있는데?”

저거 너무 구려요. 찜질방 옷 같아.”

 

 

 

하긴. 자신도 그러한 연유로 번거롭게 운동복을 챙겨 다니고 있으니 무어라 할 말은 없다. 요즘 학교 체육복은 깔끔하게 잘 빠졌구나, 하는 마음에 좀 더 훑어본다. 가슴팍 한편에는 학교 로고가, 반대편에는 명찰이 달려있는 걸 확인한 한솔은 명찰을 주시했다. 부승관. 곱게 자수 놓인 이름이 무척이나 특이해 눈썹이 들썩였다. 부 씨는 처음 보네.

 

 

 

부승관?”

헐 깜짝이야. 명찰 봤어요?”

. 부 씨 처음 본다. 신기해.”

제주 부 씨예요. 저 중학교까지는 제주도에서 살았어요.”

고등학교는 서울로 온 거고?”

. 음악 배우고 싶어서, 예고 진학했어요.”

 

 


그렇구나. 하고 싶은 게 있어서 서울까지 상경했다라, 멋있네. 아무래도 얘기가 계속 이어질 것 같은 참이라 반대편의 이어폰도 빼내어 주머니에 넣었다. 핸드폰의 노래를 꺼야하는데어쩐지 맑은 눈에서 시선을 떼면 안 될 것 같아서 이어폰을 빼는 것으로 대신한다. 어려서 그런가, 눈빛이 맑으면서도 확실히 힘이 있다.

 

 

 

형은 이름이 뭐예요?”

 

 

 

형이라고 부르랬다고 곧잘 형이라고도 부르네. 그게 괜히 웃겨 피식 웃다가 최한솔, 하고 이름을 알려준다. 초면에 이름까지 알려주다니, 제 친구가 보고 있었다면 최한솔이 이상하다고 이마를 짚으며 열이라도 재줄 일이다. 왜 거부감이 안 들까. 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꺼내고 이름까지 묻고 있는데.

 

 

 

형은 몸 키우려고 운동해요?”

그냥 남는 시간에 다니다 보니 키워졌어.”

 

 

 

그렇구나. 제 팔의 근육을 부럽다는 듯이 바라보는 승관이 귀엽게 느껴져 한솔은 팔을 매만지며 웃었다. 어쩌다보니 운동 시간 내내 같이 다니며 얘기를 나누게 됐다. 사실 러닝머신에서 내려간 뒤에는 그냥 운동 열심히 하라고 어깨나 두어 번 툭툭 쳐주려 했는데,

 

 

 

형 이거 어떻게 해요?’

형 이 기구 무게 조절 좀 해주세요.’

!’

 

 

 

하루 종일 졸졸 따라다니며 이것저것 물어오는 통에, 차라리 오늘 하루 전담으로 도와주는 게 낫겠다 싶어 아이의 옆에 붙어 코치 역할을 도맡았다. 혼자 헬스장을 뽈뽈거리며 헤맬 것 같아 걱정되기도 했고, 하루 종일 웃을 일이 없었던 자신을 계속 웃게 해준 게 고맙기도 했고. 간단한 운동은 아이를 봐주며 자신도 설렁하게나마 했으니 괜찮지 않겠나. 운동이 끝나고 샤워까지 끝마친 한솔은 머리를 수건으로 아무렇게나 문지르며 물기를 털어냈다.

 


 

형 벌써 나왔네요?”

. 방금.”

 

 


자신이 다니는 헬스장의 샤워시설이 칸 별로 나뉘어져 있어 망정이지, 하필이면 초면인 아이와 샤워까지 함께 할 뻔했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던 아이가 정장으로 갈아입은 한솔이 신기한 둣 눈을 반짝였다. 양복에 젖은 머리라 모양새가 좀 그런가. 괜히 신경이 쓰인 한솔은 머리라도 빨리 말려야겠단 생각에 드라이기의 전원을 켰다.

 



"정장 입으니까 멋있어요."

"고마워."
"나도 살 빼면 정장 잘 어울릴까요?"

 

 

 

살을 왜 빼? 볼 통통한 게 매력인 것 같은데. 진심으로 의아해 던진 제 물음에 아이의 볼이 붉어진다. 오물조물입만 벙긋거리던 아이는 엄마가 볼살이 너무 쪘으니 빼라고 헬스를 끊어준 거라며 띄엄띄엄 대답을 했다. 그렇구나. 칭찬에 약한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 좀 더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자신은 생전 친구한테도 장난은 잘 안 걸던 사람인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안 빼도 돼."

"진짜요?"

". 귀여워."

 

 

 

너는 말해라, 나는 얼굴을 붉힐 테니. 화르륵, 얼굴이 새빨개져선 연신 머리만 매만지고 있는 아이가 귀여워 마음속으로는 이미 배를 잡고 구르고 있다. 학생이랑 대화해본 게 오랜만이여서인지, 아니면 아이가 유독 귀여워서 인지는 모르겠다.

 

 

 

"매일 이 시간에 올 거야?"

", . 학교가 늦게 끝나서……."

"잘됐네. 나도 매일 이 쯤에 와."

 

 

 

사실은 부서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규모가 커진 탓에 업무량이 늘었고, 그래서 늘 다니던 이 시간에 다니는 건 무리라는 이아기는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 업무가 많으면 좀 더 일찍 출근하면 되겠지하는 안일한 생각을 품은 채 아이를 바라본다. 나는 아직 네가 내게 왜 말을 건 건지는 모른다. 정말 운동하는 법을 몰라 배우기 위함이었는지, 아니면 나와 친해지고 싶었던 건지, 그것도 아니면 내가 모를 또 다른 이유인지.

 

 

 

"내일도 같이 운동해."

 


 

수많은 사람들 중 내게 말은 건 것은 너다. 너는 우연히 내게 말을 걸며 한 발짝 다가왔고, 나는 또 다른 우연을 가장해 그 걸음에 답했다. 이러한 우연이 모이고 모이다 보면 새로운 인연이 되지 않겠나.

 

 

 

"좋아요."

 

 


, 이미 된 것 같긴 한데.









-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