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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솔부 8월 호] 손 깍지 下

[최한솔 X 부승관]

손 깍지 下

 

 

 

 

고백을 해야겠다, 하고 마음을 먹는 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감정을 자각한 후 몰려온 혼란스러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 후 자연스레 들었던 생각은 말해야겠구나.’ 였다. 입 밖에 내고 나면 녀석을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크긴 했으나, 이대로 속이며 지낼 수 없다는 마음이 더 컸다. 원래 거짓말을 잘 못하는 성격이 크게 한 몫 하기도 했고. 아무래도 들키는 것 보다야 먼저 말하는 게 낫지 않은가 싶어서. 그리고 자신은 누구랑은 다르게 오래 속앓이 할 성격도 못 되니까.

 

 

 

 

아이고오…….”

 

 

 

 

앓는 소리를 내며 책장을 넘기자 샤프 자국들로 지저분한 종이들이 맥없이 넘어갔다. 공부를 할 때만큼은 잡념을 잊을 수 있어서 좋았다. 복잡하고 토 나오는 공식과 지식들을 머릿속에 꾸역꾸역밀어 넣고 나면, 다른 생각들의 자리가 좁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 승관은 여러 걱정 때문에 공부가 안 된다기 보단, 외려 그것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 공부를 한다는 쪽이 맞았다. 공부라도 잘 돼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안도의 한숨도 몇 번 내쉬었던 것 같다.

 

어느새 마지막 장까지 다 풀어버린 문제집을 확인한 승관은 볼펜 끝을 입에 물고 한솔을 생각했다. 따지고 보, 친구에게 이런 마음을 품게 된 것 자체가 미안한 일이지 않은가 싶다. 걱정 반, 근심 반. 거기에 부정적인 사고 한 주먹. 고백을 준비함에 앞서 긍정적인 생각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소중한 사람이니까. 누구보다 소중하니까. 잃기 싫은 마음에 발버둥을 친다. 가족만큼이나 커다란 존재. 그런 사람을 잃을 수도 있다는 건 끔찍하게 무서운 일이다.

 

 

 

 

안 잃을 수는 없나.”

 

 

 

 

한솔을 잃지 않는 상황은 딱 두 가지다. 하나는 녀석이 그냥 다 덮고 친구로 지내자고 하는 것, 또 하나는 자신을 좋아해주는 것.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가, 망설임 없이 하나를 접어 내린다. 전자는 기각될 수밖에 없다. 다 덮고 지낼 자신이 없어서 고백을 하는 것인데, 계속 친구로 지내자는 부탁을 받아줄 수 있을 리가 있나. 그리고 후자는

 

 

 

 

말이 안 되잖아, 말이.”

 

 

 

 

남은 손가락 하나를 마저 접어내리며 다시금 실소를 머금는다. 한솔이 자신을 좋아해준다? 그래서 연애라도 하게 된다? 말도 안 돼. 승관은 코웃음을 쳤다. 대체 몇 번째인지 헤아리기도 어려운 자신을 향한 비웃음. 가당치도 않은 소리다. 동성에 절친, 뭐 속된 말로 불알친구. 절대 쌍방통행이 될 수 없는 관계이지 않나. 짝사랑이라고 정의 내린 그 순간부터, 어쭙잖은 기대 따윈 절대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하찮은 기대는 이성을 갉아먹는다. 그렇게 갉아 먹힌 이성은 그른 판단을 부르고, 결국엔 후회로 이어지고 마는 것이다. 예를 들어녀석의 앞에서 울어버린다거나, 좋아해달라고 구걸하던가 하는 스스로를 더 비참하게 만드는 행동들.

 

 

 

 

제일 쿨 하게제일, 멋있어 보여야지.”

 

 

 

 

녀석의 머릿속에서 마지막으로 남게 될 모습이라 생각하니 벌써부터 속이 쓰린 것 같다. 그나마 제 고고한 자존심이 꺾이지 않으려면 마지막 모습만큼은 제일 멋지고 쿨 해 보여야 한다. 죄다 풀어버린 문제집들이 쌓인 더미에 마지막 문제집을 올린 승관은 그것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높게 쌓인 문제집들은 뿌듯함을 안겨주면서도 우스운 생각을 떠올리게 만든다. 저게 다 합치면 얼마야, 하는 별로 무게 있지도 않은 잡념.

 

 

 

 

많이도 풀었네.”

 

 

 

 

어느덧 수능이 하루 앞으로 다가온 시점이다. 시험을 치르게 될 학교에도 다녀왔고, 일명 할인 티켓이라 불리는 수험표도 받았다. 승관은 수험표를 매만지며 다시금 상념에 잠겼다. 한솔과는 같은 학교에서 시험을 보게 되었다. 각기 다른 학교로 배정받기 마련인데 운 좋게도 붙어 이게 웬일인가 싶었다. 신기한 나머지 새삼 손을 맞잡고 기뻐했더랬다. 선생님께 수험 시 주의사항을 듣는 내내 실없이 웃음이 나는 스스로가 한심했지만 그래도 마냥 즐거웠다. 고작 최한솔이 같은 학교에서 시험을 본다는 사실에. 녀석이 같은 학교 내에서 시험을 본다는 것만으로도 안정감이 들었다. 하도 웃는 탓에 다른 놈들이 최한솔이 그리도 좋냐며 놀려대기도 했다. 그럼에도 멈출 수가 없었다.

 

정말인데 어떡할까. 그렇게도 좋다. 결국은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내일이라니…….”

 

 

 

 

중요한 시험이 막상 코앞에 닥치고 나니 기분이 묘하다. 찹쌀떡과 초콜렛 따위가 선물로 들어오는 일이 잦아져도, 우스갯소리로 엿 먹으라며 엿 선물을 받아도 얼떨떨하기만 했는데. 공부야 여태껏 해온 게 있으니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을 테지만, 제겐 어쩌면 수능보다 더 큰 숙제가 있으니 안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공부보다 어려운 최한솔 같으니라고. 혼잣말을 중얼이던 승관은 책상 위에 조심스레 엎드렸다. 차가운 유리가 볼에 닿으니 어지러운 머리에 자극이 좀 되는 것 같다. 끔뻑끔뻑, 가만히 눈만 깜빡이던 차에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최한솔이려나.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는 승관의 움직임이 제법 재빨랐다.

 

 

 

 

[, 공부 마무리는 잘하고 있어? 내일 학교 같이 가게 730분까지 나와. 1분이라도 늦으면 버리고 갈 거니까 늦지 말고.]

 

 

 

 

보통은 승관아, 하고 이름을 부르는 녀석은 이따금 부, 라고 자신을 불러왔다. 아무래도 어머니가 미국인이신만큼 그 영향을 받았겠지.

 

 

 

 

, …….”

 

 

 

 

승관은 라는 호칭이 좋았다. 그렇게 자신을 부르는 녀석은 한솔뿐인지라 특별하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사실은 최한솔을 좋아해서, 그래서 ''라는 호칭이 좋았던 걸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애칭 같기도 하고……. 툴툴대는 척 다정한 문자에 승관은 입가에 피어오르는 웃음을 억눌렀다. 사소한 데에 의미부여하기 바쁜 지경이 이르렀지만 별 수 있을까. 답장을 보내기 위해 놀리는 손가락의 움직임은 빨라진지 오랜데. 있는 힘껏 올라가겠다며 용을 쓰는 입 꼬리를 진정시키느라 얼굴 근육이 아려왔다.

 

 

 

 

[마무리 다하고 이제 자려고. 너도 일찍 자. 30분에 우리 집 앞에 너 없으면 바로 갈 거야.]

[오냐. 잘자라.]

 

 

 

 

역시 좋아할 수밖에 없나 싶다. 잘 자라는 말로 끝을 맺은 문자와는 달리 심장의 불규칙한 박동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전하고 싶다. 못 견디게 좋은 마음을. 이래서 고백들을 하는 거구나, 하고 문득 깨달았다. 역시 뭐든 겪어봐야 아는 거구나, 하고 실없는 생각도 잠깐.

 

 

 

 

내일 보자, 최한솔.”

 

 

 

 

휴대폰 액정을 매만지며 인사를 한다. 제 손에 쥐어진 딱딱한 전자 기기가 꼭 최한솔이라도 되는 것 마냥 조심스럽게, 애틋한 마음을 실어서.

 

 

 

 

* * *

 

 

 

 

잘 잤어?”

. 너는?”

나도 적당히 잤어. 긴장해서 못자면 어쩌지 했는데, 졸리더라.”

 

 

 

 

수능이 체질인가? 아침부터 소름끼치는 농을 던지는 최한솔의 이마에 꿀밤을 있는 힘껏 먹여준다. 그에 아프다며 이마를 어루만지는 녀석을 보며 크게 한 번 웃고. 아침에 집을 나서자마자 한솔이 보이는 건 오랜만인지라 역시 들뜨는 마음이다. 집이 근처긴 하지만, 승관은 학교에 일찍 가서 수업을 준비하는 걸 좋아했고, 잠이 유독 많은 한솔은 이른 시간의 등교를 버거워 했다. 때문에 등교 시간이 맞질 않아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만 함께 등교하곤 했다. 오늘은 고등학교 생활 중 가장 특별한 날이니, 한솔이 아침 일찍 제 집 앞까지 행차해준 것이다.

 

 

 

 

교문 보인다.”

, 사람 진짜 많네.”

 

 

 

 

여느 수능 날의 교문 앞이 그렇듯 축하해주는 사람 반, 시험 치러가는 사람 반이다. 고작 시험 하나가 뭐라고 다들 입을 모아 응원해주는 걸까. 그것도 이렇게 추운 날에. 손 좀 녹이라며 선생님이 쥐어준 종이컵에선 따뜻한 율무차가 찰랑였다. 조심스레 한 모금 홀짝이고는 주변을 훑어본다. 어차피 사람이 너무 많아 빨리 지나가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들은 물론이고 명찰 색을 보아하니 후배인 것 같은 학생들도 보였다. 물론 자신은 동아리나 학생회에서도 그다지 후배들과 연을 쌓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이 낯선 얼굴들인 게 당연했다.

 

 

 

 

한솔 오빠!”

, .”

이거 드세요! 수능 잘 치르세요, 응원할게요. 옆에 선배도요!”

 

 

 

 

한솔 오빠? 응원할게요? 옆에 선배도요? 귀에 박히는 말들은 하나같이 맘에 들지 않는 것들이라 눈썹이 절로 꿈틀댔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동아리도 시큰둥, 학생회도 시큰둥으로 일관해온 최한솔인데. 저 여자앤 뭔데 녀석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부르며 오빠 거리는 건지 모르겠다. 한솔에게 추근거리는 것도 맘에 안 들고, 겸사겸사 저까지 응원해준 것도 별로다. 꼭 덤이 된 것 같잖아. 게다가 그 쪽 응원은 안 받고 싶은데 말이지. 얼굴도 처음 본 아이를 속으로 잘근잘근, 씹어대기 바쁘다. 이 부글부글한 마음을 풀 곳이라곤 원인을 제공한 눈앞의 최한솔 뿐이다. 네 이놈, 쓸데없이 잘생겨선. 그것도 과하게 말이지.

 

 

 

 

아는 애야?”

아니, 그냥 얼굴만 아는 사이. 민규 여동생이라서.”

요즘 얼굴만 아는 사이는 초콜렛도 주고 응원도 해주는 구나.”

 

 

 

 

나만 몰랐네? 이죽거림이 가득한 제 말에 당황한 듯 손을 젓는 한솔을 슬쩍 보다가 걸음을 빨리했다. 사실 그렇게 당황할 것까진 없다. 혹시 한솔이 좋아한다던 그 사람일까 하는 생각에 기분이 나빠졌을 뿐이다. 단지 그것뿐인데. 온힘을 다해 부정하는 걸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제법 예쁘장하게 생긴 얼굴을 보며 자연스레 머릿속에선 상상이 그려졌다. 둘이 다정히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모습. 그러자 배 어딘가가 아려오며 대뜸 신경질이 났다. , 질투나면 배 아프단 말이 이거였네.

 

 

 

 

너 고사실 여기 아냐?”

? .”

잘 보고, 실수하지 말고, 너의 님 생각하다 마킹 실수하지 말고.”

 

 

 

 

점심시간에 보자. 교실 문 앞에 선 한솔의 팔을 툭툭 쳐주고는 등을 돌렸다. 마치 뒤를 돌아보면 녀석이 보고 있을 것만 같아 걸음걸이에 온 신경이 쏠린다. 중요한 시험을 코앞에 두고 날카롭게 군 게 미안했지만 별 수 없는 일이었다. 질투 나는 걸 어떡하라고.

 

 

 

 

* * *

 

 

 

 

잘 봤냐?“

, 평소대로.“

 

 

 

 

역시 녀석에게 있어 공부에 대해선 걱정할 필요가 없다. 최한솔이 평소대로 풀었다는 말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내쉬어졌다. 보나마나 평소처럼 잘 풀었단 소리니까. 승관은 맨밥을 우겨넣으며 별 필요 없었던 걱정을 밥과 함께 삼켰다. 너는 잘 봤어? 어쩐지 조심스러운 한솔의 목소리에 승관은 고개를 몇 번이나 주억였다. 나도 평소처럼 풀었으니까 걱정 마. 한솔의 마음이 좀 더 편해지라고 말도 한 마디 던져준다. 아까 이죽거린 게 아직도 마음에 걸리는 건가 싶다.

 

 

 

 

님 생각은 안했나보네.”

, 진짜. 걘 절대 아니래도.”

누가 걔라고 했냐. 시험 끝나면 고백한다던 너의 님 말하는 거지.”

 

 

 

 

제 말에 흠칫하는 한솔의 모습이 우습다. 그렇게 깜짝 놀랄 정도로 민감한 부분인가 싶어서. 그래서 좀 더 놀려주고 싶었다. 고백은 어떻게 할 건데? 막 꽃 줄 거야?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인지 몰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말은 제법 거침없다. 장난기 가득한 어조로 한솔을 놀리면, 제 앞의 잘생긴 얼굴은 조금 붉어진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 입 꼬리가 줏대 없이 올라간다.

 

 

 

 

안 알려줘.”

?”

비밀이니까.”

 

 

 

 

시험 분위기에도 적응했고, 앞의 과목들을 풀어나가며 이번 수능이 그리 어려운 난이도는 아니라고 짐작도 했다. 그래서 무거웠던 마음이 많이 가벼워졌다. 그래서 더 장난스럽게 말했던 건데. 한솔이 툭 내뱉은 말 한마디가 뜬금없이 마음을 후벼 판다. 비밀, 비밀이라. 반쯤 비운 도시락에 젓가락을 옮긴다. 그리곤 아무렇게나 집어 올려 입에 가져간다. 입에 들어온 게 밥인지, 반찬인지도 모른 채 우물우물. 줏대 없이 올라갔던 입 꼬리는 어느새 가만히 내려앉아 자리를 지킨 지 오래다.

 

 

 

 

그럼 우리 공유하자.”

?”

비밀,”

 

 

 

 

나도 있어, 비밀. 승관은 혀를 쭉 내밀며 익살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한솔의 눈썹이 일렁이며 미간이 찌푸려졌다. 무슨 비밀인데. 확연히 가라앉은 목소리 톤에 승관의 미간도 덩달아 찌푸려진다. 누군 비밀이라곤 없는 줄 아나. 무어라 말이라도 쏘아붙일 심산으로 입을 열려다가 한솔의 입이 먼저 열리는 통에 도로 꾹 다물고 만다.

 

 

 

 

혹시 그거야?”

?”

네가 시험 끝나면 알려주겠다던 거.”

맞아. 듣고 놀라지나 마.”

 

 

 

 

너무 놀라서 나자빠지면 병원엔 데려다줄게. 실없는 농담을 끝으로 승관은 도시락 뚜껑을 탁 소리 나게 덮었다. 반도 넘게 남은 밥과 반찬들이 이대로 끝이냐며 애절하게 바라봐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 문드러진 속에 어떻게 뭘 더 밀어 넣을 수 있을까. 비록 장난 식으로 흘려보낸 말을 녀석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이제는 쌓아온 모든 것을 토해내고 싶은 마음뿐이니까. 사사로운 것에 감정을 소모할 여유까진 남아있지 않았다.

 

 

 

 

얼른 알려주고 싶네.”

 

 

 

 

정말이다. 정말이지더 이상 품고 있다간 곪아 문드러져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만 같다. 이 애달픈 마음도, 그 마음을 품고 있는 자신도.

 

 

 

 

* * *

 

 

 

 

모든 시험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저마다 왁자지껄, 각자 목소리를 내려고 아등바등 거린다. 오늘 같은 날엔 그럴 만도 하지 싶어 시끄럽다 소리치고 싶은 입을 벙긋거리기만.

 

이 날을 위해 공부하며 달려온 세월이 몇 년이던가. 자그마치 12년이다. 승관은 혹시 몰라 챙겨온 문제집을 교실 뒤에 있는 분리수거함에 던져버렸다. 드디어 끝났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가방을 챙기기 위해 필통부터 정리한다. 물론 시험을 망쳤다면 지금쯤 울고 있었을 거란 소름끼치는 생각도 잠깐.

 

 

 

 

, 집 가자.”

깜짝이야.”

 

 

 

 

부러 교실 앞까지 자신을 데리러 온 한솔이 보이자 짐을 싸던 승관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분명 시험 끝나고 교문에서 만나자고 해놓고 굳이 데리러 와선. 말은 툴툴대면서도 그 말을 내뱉는 입가는 웃음이 머금어져 있다. 시험이 끝나서 기쁜 마음 반, 힘든 마음을 망라해서도 제 앞의 녀석이 좋아죽겠는 마음 반.

 

 

 

 

! 눈 온다.”

그러게. 첫눈인가.”

 

 

 

 

올해의 첫눈은 퍽 늦었다. 겨울에 태어나서인지 몰라도 눈을 좋아하는 승관은 이게 다 지구 온난화 때문이라며 발을 동동 굴렀더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솔은 내가 애랑 노나 보다, 하고 꼭 한 마디씩 던지곤 했고. 교문을 나서자 하나 둘 내리는 눈꽃들이 보여 승관의 입에서는 기어코 큰 소리가 튀어 나왔다.

 

 

 

 

수능 끝난 기념 선물인가?”

좋네.”

 

 

 

 

어느새 눈이 희미하게 쌓인 길에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사락, 하고 녹아버려 자취를 감춘다. 그 모습에 아쉬우면서도, 빨리 눈이 쌓여 소복해지길 기다린다. 최한솔이랑 눈싸움 해야지. 아이처럼 철없는 생각을 하고 나면, 그 뒤로 오늘이 마지막 아니냐며 이죽이는 비웃음이 들려온다

 

 

 

 

, 한솔아.”

.”

오늘 고백하러 가냐?”

 

 

 

 

맞다. 오늘이 마지막. 잠시나마 잊고 있었던 끝을 다시금 곱씹는다. 최한솔이 그 사람에게 고백하러 가기 전에 먼저 털어놓을 심산이었다. 그러고 나면 정말 끝이다. 난생 처음 속 끓여본 짝사랑도, 고백을 고민하면서까지 잃고 싶지 않았던 친구 사이도.

 

 

 

 

. 오래 기다렸으니까.”

 

 

 

 

오롯이 자신만을 보는 갈색 눈동자가 무섭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어쩐지 마음의 결정이 섰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았다. 평소 로망으로 그리던 멋들어진 장소에, 말끔한 복장이 아니더라도 좋았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되겠다는 마음 하나면 충분하다.

 

 

 

 

그러면 너 가기 전에, 나도 좀 하자.”

?”

고백.”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밟으려고 느릿하게 옮기던 걸음을 멈춘다. 그에 자신을 맞춰주던 발도 함께 멈추었다. 막 다다른 인적이 드문 골목길엔 자신과 한솔뿐이라 지금이 기회지 싶다. 승관은 몸을 돌려 저보다 조금 큰 한솔을 올려 보았다. 도통 뭔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자신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는 눈을 거부하지 않고 빤히 마주했다. 어쩐지 웃음이 난다. 드디어 말해보는 구나, 싶어서.

 

왜인지 몰라도 꼭 말해야 할 것 같았던 말. 친구 사이가 끊어지더라도 한 번쯤 꼭 해주고 싶었던 말. 입 밖으로 소리 내기도 무서워 수도 없이 벙긋거렸던 말을 오늘 한다.

 

 

 

 

좋아해.”

?”

 

정신 차려보니까 좋아하고 있었어. 언제부터였는지는 잘 모르겠고어떡할까 하다가 그래도 말해주고 싶어서.”

…….”

 

고백까지 할 정도로 누굴 좋아하는 건 어떤 걸까 했는데, 알게 되니까 기분이 새로웠어. 좀 혼란스럽기도 했고.”

.”

 

나 엄청 겁쟁이에 소심한 거 알지?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 고백일 거다.”

 

 

 

 

말 다 하고 나니까 쪽팔리네. 흔들리면서도 꿋꿋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어쩐지 버거워져 승관은 허공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나 둘 씩 내리던 눈은 어느새 조금씩 더해져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냈다. 그 절경을 잠깐 바라보다 다시금 제 눈앞의 한솔을 마주한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났다. 지금 눈을 맞고 있는 최한솔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거 중증인가.

 

 

 

 

잠깐만나도 말 좀 하자.”

무슨 말.”

내가 하고 싶었던 말, 네가 다 했잖아. 이게 뭐야. 난 이거 말하려고 공부도 열심히 했는데.”

 

 

 

 

예상했던 흐름이 아닌데. 안 좋은 말이라도 해올까 싶어 움츠렸던 몸이 어느새 곧게 펴졌다. 표정이나 말투를 봐도 다음으로 이어질 말이 무슨 내용일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승관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한솔의 말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쟤가 지금 뭐라는 거야.

 

 

 

 

예상 밖의 전개여서 엄청 놀랐어. 근데, 기분은 엄청 좋다.”

기분이 왜 좋아?”

 

 

 

 

친구가 좋아하는 게 기분이 나쁘지도 않나 싶다. 속 좋은 놈이네,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답답한 마음을 핑계 삼아 바닥에 어설프게 쌓인 눈을 신발 앞코로 헤집었다. 나 좀 보면 안 돼? 자신을 부르는 나긋한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바닥에 내리 꽂았던 시선을 다시금 한솔에게 맞춘다. 제 물음에 대답을 해주려는 한솔의 입가에는 웃음이 머금어지다 못해 흘러넘칠 지경이다. 뭐가 그리 좋은 건지.

 

 

 

 

좋아하니까 그렇지, 멍청아.”

?”

 

, 멋있게 말하려고 엄청 연습했는데.”

 

 

 

 

망했네. 그리 내뱉곤 연신 웃는 얼굴을 가만히 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제 앞에서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는 잘생긴 놈의 말마따나 예상하지 못한 전개다.

 

 

 

 

내가 먼저 좋아했고, 더 좋아해. 장담할 수 있어.”

뭐야…….”

뭐긴 뭐야. 너랑 나랑 삽질했단 거지.”

 

 

 

 

넌 나 따라오려면 멀었고. 한솔은 말을 끝냄과 동시에 승관의 팔을 잡아당겨 제 품에 끌어안았다. 어지러운 상황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한솔의 품에 안겨진 승관은 눈을 깜빡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포옹을 해본 적은 몇 번 있긴 한데, 보통 축하할 일이 있을 때나 위로할 때 슬쩍 안고 말았던 터라, 제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는 이 손길은 낯설었다. 친구 관계는 이렇게 끝나는 건가. 문득 든 생각에 승관은 머리를 굴렸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러면.”

.”

 

 

 

 

너랑 나랑 연애해? 급작스레 튀어나온 촌스런 물음이 우습지도 않은지 한솔은 연신 제 뒤통수를 어루만져주었다. 승관은 그 느낌이 너무나도 나른해 잠결인가,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혹여나 꿈이면 깨버릴까 하는 마음에 가만히 두었던 팔을 들어 올려 한솔을 마주 안았다.

 

 

 

 

. 너랑 나랑, 오늘부터 연애해.”

그렇구나.”

 

 

 

 

연애, 연애라. 붕붕 떠오르는 마음을 감출 방도가 없다. 도무지 웃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는 상황이지 않은가. 자꾸만 올라가는 입 꼬리를 감추려 한솔의 어깨에 깊게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자 제 몸을 두른 팔에 좀 더 무게가 실리는 게 좋았다. 여태 속 앓이 했던 게 하나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두근거리기 바쁜 심장은 지금 당장 입 밖으로 튀어나온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쿵쾅거렸다.

 

 

 

 

나 지금 너무 행복해.”

얼만큼?”

 

진짜 많이, 엄청 많이……. 게다가 눈도 오잖아.”

 

 

 

 

아이 같은 말에 한솔은 맥없이 웃으며 제 품에 안긴 승관의 머리를 헝클었다. 사실 자신은 눈을 썩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승관과 마찬가지로 겨울 출생이지만, 눈이 내릴 때의 풍경이 아름답고 말고를 떠나 눈이 오고난 후 질척거리는 땅이 별로여서. 그러나 매년 함께 보내는 겨울마다 동동거리며 기뻐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이제는 홀로 눈을 봐도 승관의 웃는 모습이 떠오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니 혼자 눈을 보며 실없이 웃는 바보가 될 수밖에 있나. 지극히 현실적이었던 자신을 감성적으로 만든 것도 승관이다. 자신의 마음이 이렇게나 큰 걸 부승관은 언제쯤 알아주려나, 하고 오늘도 생각한다. 이제 연애도 시작하는 마당이니 조만간 알아주려나.

 

 

 

 

, 너 때문에 수학도 엄청 열심히 공부했어.”

진짜?”

 

. 도와주고 싶어서.”

 

 

 

 

정말 그랬다. 제일 싫어하는 과목이지만 그래도 중박은 치던 게 수학이었는데. 수학시간마다 표정이 굳고, 시험기간이 되면 수학 때문에 잠 못 자기 바쁜 승관을 보며 조금이라도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했다고, 내 수학 성적이 오른 것보다 네 성적이 오른 게 더 기쁘다고……. 말해줄 수 있어서 기쁘다. 하고픈 말이 있어도 꾹꾹 참아오던 게 일상이라, 뒤늦게 입을 떼려니 온갖 말들이 앞 다투어 나오겠다고 난리도 아니다. 어떤 말부터 해줘야 네가 기뻐할까.

 

 

 

 

승관아.”

?”

 

 

 

 

제 몸을 감싸던 양 팔을 떼어내어 작은 두 손을 꼭 잡아 쥐었다. 품에서 빠져나와 자신을 바라보는 맑은 눈이 좋았다. 이제는 숨김없이 대할 수 있다는 게 기쁘다. 네가 밥 잘 먹을 때마다 내가 다 흐뭇하고, 어깨동무를 할 때면 내 허리를 감아오는 네 팔이 좋고, 작은 농담에도 해사하게 웃어주는 네가 예쁘다는 말도 다 해주고 싶었는데. 마주한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오롯이 눈을 맞추다가, 그러쥔 손을 꼼지락거려 조심스레 손깍지를 걸었다. 겹쳐진 손가락 마디마다 설렘이 흘러넘쳤다.

 

 

그래도, 이 말이 제일 해주고 싶었어.

 

 

 

 

좋아해.”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