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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솔부 8월 호] 손 깍지 中

[최한솔 X 부승관]

손 깍지 中

 

 

 

 

 

고등학교 시절의 묘미는 연애라고 할 수 있지 않나. 그것을 빌미 삼아 주변의 사내놈들은 수시로 여자 친구를 갈아치웠다. 어제는 걔, 오늘은 얘. 그런 가당치도 않은 연애 놀음에서 한솔과 승관은 약간 동떨어져 있었다. 왜 연애를 안 하냐는 물음을 받을 때면, 승관은 연애에 별 다른 흥미가 없다 대답했고, 한솔은 그냥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며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많게는 일주일에 한 번, 적어봐야 이주에 한 번 고백을 받는 녀석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았지만.

 

누군가를 좋아해본 적은 없었으나, 고백이란 것은 두어 번 받아본 적이 있다. 한 번은 말로만 듣던 러브레터를 받아보았고, 또 한 번은 문자로 받아보았다. 살면서 러브레터라는 것도 받아보는 구나. 종이에 실린 마음을 읽어 내리는 내내 들었던 신기한 마음.

 

 

 

 

어설프게 손에 쥐어주던 편지, 이유 모를 번호에게서 왔던 어색한 문자.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도 있구나, 하고 얼떨떨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승관은 두 번 모두 정중히 거절했더랬다. 왜 거절했냐며 물어오던 한솔의 질문에 승관은 설레지 않아서, 라고 대답했었다.

 

 

 

 

미안해.’

 

 

 

 

미안하지만 연애는 할 마음이 없어. 자신의 거절에 미약하게 떨리던 어깨를 기억한다. 얼굴이 붉어져선 등 돌리는 그녀들을 볼 때마다 느껴졌던 죄책감.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지만 꼭 죄인이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미안함보다 더 크게 밀려오던 것은 일종의 존경심.

 

 

고백까지 할 정도로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무릇 고백이란, 거절당할 때의 비참함을 알면서도 마음을 전하는 일이 아니던가. 다른 모든 것들을 감수해서라도 전하고 싶을 만큼 크나 큰 마음, 그 중 한 끝만이라도 뱉어내고자 입을 여는 하나의 발악. 그것은 분명 대단한 일임이 틀림없다.

 

 

 

 

후우.”

 

 

 

 

그런 일을 최한솔이 하려는 것이다. 2년 넘게 품어온 그 마음을 전하고자 해서. 셀 수 없을 만큼 고백을 받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거절했던 녀석이, 사실은 마음에 담아둔 사람이 있었다는 소리다. 그래서였을까. 좋아하는 사람이 있냐고 물을 때마다 한솔이 지어보였던 애매한 미소는.

 

 

 

 

일단 정신부터 차려야겠다. 제 뺨을 가볍게 내리친 승관은 다시금 펜을 잡고 지문을 훑기 시작했다. 어느덧 수능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 아무리 대학 가는 데에 반영되지 않는다고 해도 쌓아오던 게 있는 터라 신경 쓰였던 중간고사도 잘 넘겼다. 이제 정말 남은 것은 수능뿐이었다.

 

학교 수업도 죄다 자습으로 돌려졌고, 잠깐 해이해졌던 마음도 다잡은 지 오래다. 요즘은 집보다 독서실에 있는 시간이 더 길다. 방과 후에도 새벽까지 있고, 오늘 같은 주말에는 이른 아침부터 새벽까지 콕 박혀있으니. 독서실에 하루 종일 있다 보면 속이 답답하기도 하고, 이따금 한솔의 말이 생각 날 때면 아무것도 손에 안 잡히긴 하지만 뭐. 이 정도면 양호하지 않나 싶다. 괜찮아, 부승관.

 

 

 

 

 

수능이 끝나면 고백할 거라던 한솔의 말은 승관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충격은 자신에게 고스란히 돌려졌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게 아닌데, 한솔이 자신의 옆에 있는 게 당연시 느껴졌던 날들이 우스워졌기 때문이다. 물론 언제까지나 그가 옆에 있어줄 거라 기대한 자신은 더 우스워졌고.

 

지문을 훑던 승관은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대체 최한솔이 뭐길래 이렇게 마음을 쏟고 있나, 하는 자책이 담긴 실소였다. 친구라고 치기엔 너무 지나친 감정 소비 중이었음을 요즘에서야 알게 된 것이다. 친구라 단언하기엔 속에 남는 게 너무나도 많았다.

 

나는 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집중 좀 하자.”

 

 

 

 

답답한 마음에 자신을 질책해본다. 소리라도 한 번 크게 내지르면 좀 나아질 것 같은데, 독서실이라 그럴 수도 없고. 계속 이러면 옆자리의 한솔이 이상하게 여길 것이 분명했다. 슬며시 눈을 흘겨 한솔의 귀에 이어폰이 꽂혀있는 것을 확인한 승관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서 저녁때가 다 되어가나, 하고 휴대폰을 들어 확인한 시간은 6시가 조금 못 되었다. 좀만 있으면 밥 먹자고 하겠네. 그 전까지는 집중해야 하는데. 입술을 잘근거리던 승관은 지문에 집중하기 위해 애를 썼다. 자신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분명 한솔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냐며 물어올 것이다.

 

 

 

 

…….”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 분명 아무 말도 못하고 쳐다볼 수밖에 없을 테니까.

 

 

 

 

* * *

 

 

 

 

너 요즘 무슨 일 있지?”

아니?”

 

 

 

 

그래, 내가 누굴 속이겠냐. 상대는 최한솔인데.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승관은 허탈하게 웃고서 바나나 맛 우유를 쪽 빨아들였다. 저녁은 가볍게 먹자는 의견이 일치해 근처 편의점에서 아무렇게나 때운 참이었다. 승관은 반도 채 비우지 않은 라면 용기를 밀어두고서 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저게 다 먹었단 건가. 요즘 승관의 모습이 영 맘에 들지 않았던 한솔은 눈 똑바로 보고 말하라며 대뜸 얼굴을 들이밀었다. 퍽 오버스러운 방법이었으나, 승관의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는 별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니 이게 미쳤나. 갑자기 가까워진 한솔을 보고 놀란 승관은 결국 사래가 들리고 말았다. 켁켁. 눈물이 그렁하게 맺혀선 연신 기침하는 승관이 안쓰러웠는지, 한솔은 걱정 어린 표정으로 휴지를 몇 장 뽑아 손에 꼭 쥐어주었다. 하여간 뭘 못하겠네, 진짜.

 

 

 

 

최한솔 때문에 죽을 뻔했어.”

내가 뭘 했다고.”

 

 

 

 

그래. 네가 한 거라곤 그 잘난 얼굴을 대뜸 들이대서 사람 놀라게 한 것밖에 없지. 굳이 더 뽑자면, 요즘 날 헷갈리게 했다는 것 정도? 승관은 얼얼한 목을 달래기 위해 다시금 우유를 빨아들였다. 얼마 남지 않은 우유는 빨대를 타고 올라와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끝을 다했다.

 

물어볼 거면 그냥 물어볼 것이지, 꼭 맞닿을 것처럼 얼굴을 대뜸 들이밀고. 아주 그냥, 꿀밤이라도 한 방 먹였어야 했는데. 얼굴에 오르는 열을 짐작해보아 지금쯤 보기 좋게 붉어졌을 게 분명하다. 억울한 마음에 승관이 매서운 눈으로 쪽 째리면, 그 째림을 받은 한솔은 더 인상을 구겨온다. 어쭈, 저 놈 봐라. 잘생긴 얼굴 일그러트리면 뭐 무서울 줄 알고.

 

 

 

 

왜 그렇게 봐.”

너 때문에 사래 들렸으니까.”

참나, 뭐가 나 때문이야.”

너 때문이지! 대뜸 얼굴부터 들이대고!”

네가 무슨 일 있는 지 말을 안 해주잖아.”

 

 

 

 

아무리 봐도 요즘 너 이상하단 말이야. 말을 우물거리던 한솔은 남아있던 라면 국물을 쭉 들이키곤 입을 비죽댔다. 나처럼 깨끗이 비워야지, ? 반도 안 먹어놓고. 라면 용기를 툭툭 치며 잔소리하는 한솔의 모습에 승관은 어이가 없어서 허, 하고 웃어버렸다. 그럼 내가 요즘 너를 좋아하는 건지 아닌 건지 헷갈려서, 얼굴 보는 것도 불편하다고 말을 해야겠니? ? 사람이 꼭 말을 해야 하냐고. 그냥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는 거잖아. 안 그래도 하루종일 붙어있는 것도 미치겠는데.

 

승관은 빨대 끝을 물어뜯으며 무어라 대답해야 할 지 고민했다. 제게 있어선 한없이 다정한 한솔이 요즘 들어 자꾸 밉다. 매번 걱정돼서 죽겠다는 눈빛으로 사람을 보면 어떡하냐고.

 

 

 

 

진짜 아무 일도 없어. 수능 얼마 안 남았잖아. 그래서 그래.”

진짜?”

. 진짜.”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뒤가 남는다며 한솔은 여전히 의심 가득한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정말이라니까? 그래서 나 요즘 엄청 열심히 공부하잖아. 승관이 말을 덧붙이자 그제야 한솔은 알겠다며 고개를 주억였다. 탐탁지 않은데 더 캐기 뭐하다는 의미의 끄덕임인 것 같았지만, .

 

 

 

 

하긴. 요즘 네가 열심히긴 하지.”

너도잖아. 책 뚫어지겠던데, 아주.”

. 연애해야지.”

 

 

 

 

. 연애. 잠깐이나마 잊고 있었던 단어가 다시금 상기된다. 그렇게나 공부에 전념했던 이유가 그 사람 때문이라니. 어쩐지 속이 쓰려오는 것도 같았다. 몇 젓가락 들지도 못한 라면이 뱃 속을 긁어내리고 있나. 승관은 이미 비워버린 우유곽을 구기며 할 말을 찾기 위해 애썼다. 어떻게 대답해야 제일 자연스러울까. 표정은 이미 제어가 안되는 탓에, 말이라도 자연스럽게 던져야 티가 덜 날 것 같은데. 친구가 연애하겠다는 말에 왜 이렇게 속이 답답한지 모르겠다. 보통 진즉에 했어야 했다며 축하의 박수라도 쳐주어야 하는 게 아니던가.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쁠까. 최한솔이 연애를 하겠다는 게.

 

 

 

 

한솔아.”

?”

그 사람, 많이 좋아?”

 

 

 

 

한솔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서 처음 해보는 질문이었다. 우습게도, 그가 아니라고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서 던진 물음. 가벼운 마음일 뿐이라고 단언해주었으면 해서, 그러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질 것 같아서.

 

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스스로가 너무나도 한심해 웃을 수밖에 없다. 제게 향한 조소는 쉬이 입가를 떠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이 누구보다 깊음을 알면서도 헛된 기대를 품는다. 한솔의 맘에 다른 누군가가 들어차있는 게 싫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을 빼내고 싶다. 자신만을 신경쓰던 그가 다른 이를 생각하는 것은 참을 수 없을 만큼 싫다. 미치기라도 한 건가싶을 정도로.

 

 

 

 

? 얼만큼 좋냐니까.”

 

 

 

 

이제는 자신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물어볼 수밖에 없었던 질문은 제법 절실한 것 같기도 했다. 지금 내가 품어버린 이 마음이 뭔지, 나는 너를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하는 건지. 계속 나를 압박해온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너는 알고 있나.

 

 

 

 

. 많이 좋아해.”

…….”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날 정도로.”

 

 

 

 

그런가. 너무 좋아하면 원래 눈물이 나는 걸까.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 다물린 잇새로 힘이 들어갔다. 그토록 원했던 대답은 놀랍도록 냉정하다.

 

 

 

 

너만 하냐? 나도 할 거야, 연애.”

그래. 꼭 그래라.”

 

 

 

 

승관은 코끝이 찡해오는 게 느껴져 애써 개구지게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계속해서 외면했던 진심을 이제야 마주해 보인다. 눈부시게 빛이 나서, 꼭 눈물이 날 것 같은 그 마음을.

 

우정이라 단언해왔던 경계가 허물어지고, 새로운 감정이 수면 위로 떠오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대체 자기를 얼마나 꾹꾹 눌러온 거냐며 이죽여옴에, 승관은 그저 입 꼬리를 올려 웃는 것밖엔 할 수가 없었다. 그러게나는 언제까지 감추려고 했던 걸까. 이렇게 깊숙이 자리한지 오래인 마음을. 승관은 느리게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결국 제 앞의 사내를 마주하며 인정해보일 수밖에.

 

 

 

최한솔이 좋다.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날 정도로.

 

 

 

 

* * *

 

 

 

 

인정하기 싫어 발버둥 쳤던 게 무색하게도, 감정을 자각하고 나서도 별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우리는 여전히 친구였고, 얼마 남지 않은 수능만을 신경 써야하는 수험생이었다. 하지만 자각을 하고난 뒤부터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분명 내 마음이고 내 것인데, 어느 하나도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그게 답답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무섭기도 했다.

 

매 순간 느낄 때마다 혼란스러웠던 감정들에도 이름이 붙여졌다. 그가 자신을 챙겨줄 때마다 느꼈던 철렁임, 이따금 맞잡곤 했던 손의 안정감. 너무나도 어설퍼 풋내나는 그것들이 우습기만 했다. 첫사랑은 아무래도 조금 더 로맨틱한 상황을 상상했는데. 상대가 동성에다가, 절친한 친구라니. 삼류 드라마에서도 쓰기 싫어할 설정이지 않은가. 승관은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를 지워가며 생각했다. 지우고 싶은 마음도 지우개질 몇번에 없어지면 좋겠네.

 

 

 

 

안 풀려?”

. 답지를 봐도 이해가 안 간다.”

뭔데. 도와줄까?”

그래.”

 

 

 

 

승관은 문제집을 한솔에게 넘긴 후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전에도 느꼈던 것이지만 역시 집중하는 최한솔은 멋있다. 마음을 시인하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어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좋은 걸 어떡할까 싶다. 여태 무의식 중에 눌러왔음에도 터졌다는 건, 감춰서는 해결이 되지 않을 정도로 크다는 게 아닌가. 그동안 알아차리지 못한 게 더 신기할 정도로 커다란 마음은 종종 자신을 놀라게 했다.

 

 

 

 

뭔지 알겠다. 여기 봐봐.”

? .”

 

 

 

 

한솔의 말에 불현듯 정신을 차린 승관은 문제집에 집중했다. 유독 수학에 있어서 취약했던 승관은, 수학이 제일 유리한 과목인 한솔에게 많은 도움을 받곤 했다. 녀석의 공부에 방해가 될까 싶어 최대한 혼자서 풀어보려고 해도 매번 이러고 만다. 한솔도 분명 수학을 그리 잘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어떻게 공부한 걸까.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잡념을 뒤로 하고,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는 한솔의 목소리에 조금 더 집중했다. 중간 중간 이해 됐어?’ 하고 물어봐 주는 자상함이 좋았다.

 

 

 

 

어때. 이해 가?”

. 되는 것 같다. 내가 한 번 더 풀어볼게.”

 

 

 

 

고마워. 승관은 그리 말하며 문제집을 받아들었다. 어쩜 최한솔이 설명해주면 이렇게 이해가 잘 가지? 신기함에 감탄사를 내뱉는 승관을 본 한솔은 아무래도 귀여운 듯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었다. 그리고선 자신의 공부에 집중. 승관은 제 머리를 매만져보다가 다부지게 샤프를 고쳐쥐었다. 우선은 풀지 못한 수학문제를 내 것으로 만드는 게 먼저다. 사소한 것에도 설레는 건 그 다음 일이지.

 

 

 

 

, 풀었다.”

잘했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내일 한 번 더 풀어보고.”

. 그래야지.”

 

 

 

 

수학은 너무 힘들어. 승관은 못 참겠다는 듯 거실 바닥에 벌렁 누워버렸다. 수학만 연달아서 두시간을 했더니 체력 소모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 모습을 보던 한솔은 잠깐 쉬어야겠다 싶어 물이라도 마실 참으로 냉장고로 향했다. 아주 니네 집 같다 야, 잠도 자지 그래. 승관의 밉지 않은 깐족거림에 한솔은 웃으며 찬장에서 컵을 꺼냈다. 확실히 우리 집 다음으로 제일 편한 곳이긴 하지. 그만큼 많이 왔으니까. 물통에서 컵으로 맥없이 쏟아내려지는 물은 맑은 소리를 냈다.

 

 

 

 

나도 물.”

안 그래도 이미 따랐다. .”

이야, 땡큐.”

 

 

 

 

센스있네 최한솔. 승관은 물을 홀짝이다 장난스레 말을 던졌다. 이따금 주말에 서로의 집이 빌 때면 번갈아가며 함께 공부하곤 했다. 독서실은 분위기만으로도 사람을 말리는 무언가가 있는 터라 가끔은 집에서 공부하는 게 여러모로 속이 편했다. 공부하다 힘들 때면 드러누울 수 있는 것도 좋고.

 

오늘은 토요일. 부모님은 주말동안 여행에 가셨고, 누나들은 둘 다 약속이 있다며 아침부터 바삐 나갔다. 그런고로 집에 혼자 남은 승관이 한솔을 부른 것이었다. 감정을 자각한 후 처음 집에 부르는 것이라 괜히 집도 치워보고, 목욕도 깔끔히 마친 후 머리도 신경 써가며 말렸다. 옷도 신경쓴 티는 나지 않되 추레하진 않게 깔끔히 입었고. 그러다 문득 뭐하는 짓인가하고 허탈하게 웃기도 했다. 꼭 남자친구를 집으로 부른 여자마냥 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우스웠기 때문이다.

 

 

 

 

역시 집에서 하는 게 속 편한데.”

근데 집에 혼자 있으면 공부 잘 안되지 않아?”

맞아. 옆에 누가 같이 공부해야 집중 되고.”

 

 

 

 

독서실에서처럼 안 소근거려도 돼서 좋다. 한솔의 말에 승관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어느덧 수능이 다음 주 앞으로 다가온 시점. 여태까지 공부해온 게 있는 덕에 막막한 것은 아니었으나, 불안감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능날 하루를 위해 12년을 공부해온 셈이지 않은가. 억울해서라도 잘 봐야겠단 마음에 공부량을 더 늘렸더니 피곤해 죽겠다. 한솔에게 정신이 팔려 수능을 망쳤다며 후회하고 싶지 않아 무리한 것도 있다. 어차피 좋아하게 된 마음이라면 떳떳해지고 싶었다. 이러다 과로로 쓰러지는 거 아닌가 몰라. 눈가를 주무르던 승관은 시덥잖은 생각을 했다.

 

 

 

 

최한솔아.”

.”

나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다가 과로로 쓰러지면 어떡해?”

어쩌긴 뭘 어째, 내가 업고 뛰겠지.”

 

 

 

 

누가 저희 승관이 좀 살려주세요~ 하면서. 손으로 눈물을 그리는 한솔이 우스워 승관은 소리 내서 웃었다. 정말 상상해버렸기 때문이다. 정신을 잃은 나, 그런 나를 업고 울면서 뛰는 최한솔. 꽤 감동적인데.

 

 

 

 

, 쓰러지면 안되겠다. 우리 한솔이는 나 없음 못사니까.”

뭐래.”

 

 

 

 

이런 류의 농을 칠 수 있을 정도로 편해졌다. 아무래도 모든 걸 말하기로 마음 먹고 나니 어쩐지 마음의 짐을 던 느낌이었다. 비록 그 후의 상황은 감당하기 힘들겠지만.

 

 

 

 

한솔아.”

.”

나 수능 끝나면 해줄 말 있다? 너한테.”

무슨 말?”

안 알려줄 거지롱.”

 

 

 

 

미리 말하면 그게 무슨 재미냐. 승관이 혀를 내밀고 약올리자 한솔은 뭐 저런 게 있냐며 어이 없어 했다. 편하게 얼굴 마주보며 장난 칠 수 있는 지금이 좋긴 하지만, 계속해서 숨길 생각은 없다. 표정을 감추고, 좋아하는 마음을 억누르는 일련의 과정들이 점점 버겁게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을 친구로 대해주는 한솔에게 꼭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짝사랑도 참 사람이 할 짓이 못 된다는 생각도 들었고. 이걸 최한솔은 어떻게 2년이나 했다는 건지 모르겠다.

 

 

 

 

어차피 알게 될 건데, .”

그래도. 궁금하잖아.”

 

 

 

 

내 말을 듣고 나면 너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이없다는 듯 웃으려나, 아니면 곧장 등 돌리고 떠나려나. 어쩌면 화가 나서 욕을 할지도 모른다. 승관은 애써 밝은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하려는 말이 무슨 내용인지 알게 되어도 궁금해 할 수 있어?

 

상상의 끝은 늘 그랬듯 이번에도 그리 좋지 못했다. 승관은 진즉 비운 지 오래인 컵을 흔들었다. 그러자 잔 끝에 조금 남은 물이 요동치며 원을 그렸다. 그 움직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남은 물을 입 안으로 흘려보냈다.

 

 

 

 

별 거 아냐.”

 

 

 

 

수능이 끝나면 모두 털어놓기로 했다.

이 풋내 나고 진득한 마음을.